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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쿠데타 직후, 아르헨티나 가톨릭 주교회의(CEA)의 모호한 태도

본론

1. 군사정권과 교회의 관계

군부 쿠데타 직후, 아르헨티나 가톨릭 주교회의(CEA)는 공개적으로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고, 일부 주교들은 “질서 회복”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냉전 구도 속에서 반공(反共)은 중요한 명분이 되었고, 교회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군부의 논리를 일정 부분 수용했다. 공식 성명에서는 폭력을 일반적으로 규탄하면서도 정부의 안보 정책을 이해한다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979년경 주교단이 이미 조직적 실종과 고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훗날 공개되었지만, 당시 공개적 항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 안정과 교회의 제도적 위치를 고려한 계산된 침묵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성직자 피해와 내부의 양심적 저항

모든 성직자가 침묵하거나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빈민 사목과 사회운동에 참여한 일부 신부와 수녀는 납치·살해되었다. 대표적으로 엔리케 안겔렐리 주교는 군정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다 1976년 의문사했으며, 훗날 타살로 인정되었다.

또한 197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해군기지(ESMA)에서 프랑스 출신 도미니코회 수녀 두 명과 봉사자들이 납치되어 살해된 사건은 국제적 공분을 일으켰다. 그러나 교회 지도부 차원의 강력한 공개 규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성직자의 가담: 폰 베르니히 사건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 사건이다. 그는 군정 시기 경찰과 협력하며 비밀 구금소를 드나들었고, 수감자들의 고해성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군경에 넘겨 추가 체포와 고문, 살해에 기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7년 그는 7건의 살인, 42건의 납치, 31건의 고문 공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가톨릭 사제가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교회는 “깊은 슬픔”을 표명했으나, 조직적 책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4. 독재 종식 이후의 진실 규명과 교회의 대응

1983년 민주화 이후, 아르헨티나는 진실 규명을 위해 국가실종자위원회(CONADEP)를 설치해 1984년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교회의 역할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피해자 단체인 플라자 데 마요 어머니회는 교회의 침묵을 비판했다.

1995년 주교회의는 과거에 더 단호히 말하지 못한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이후 2010년대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군사정권 관련 바티칸 문서 공개를 지시하고, 과거 교회의 대응을 조사하는 연구를 승인했다. 2016년과 2023년 공개된 자료들은 교회 지도부가 실종 정책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교회의 도덕적 책임 논의를 다시 촉발시켰다.


결론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시기 가톨릭교회의 사례는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하거나 침묵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첫째, 교회는 도덕적 권위를 상실했다.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서야 할 기관이 현실 정치 앞에서 침묵함으로써 피해자들로부터 배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둘째, 반공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판단은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악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셋째, 집단적 침묵과 조직 논리가 양심적 목소리를 억눌렀다.
넷째, 일부 성직자의 범죄 가담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제도적 감시와 책임 구조의 부재를 드러냈다.
다섯째, 역사 청산 과정에서 교회의 소극적 태도는 진실 규명을 지연시켰다.

결국 이 사례는 종교가 권력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에 둘 때에만 사회적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교회는 뒤늦게 문서 공개와 연구를 통해 과거를 직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지만, 완전한 화해와 신뢰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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